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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05 22:00
   살아있다는 것 - 201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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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njsmyrna
    조회 : 5,132  




성경은 모든 인간 보편을 죽은 자로 간주한다.
아니 그건 간주가 아니라 선언이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죽었다. 그런데 그 중에 산 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살아있음은 도대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며 증거가 될까?
 
죽었다는 것은 통점을 비롯한 모든 감각의 상실이다.
그렇다면 살았다는 것은 통점을 비롯한 모든 감각의 부활일 터...
물론 육의 감각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죽은 자들에게도 희노애락이 있다.
그러나 그건 육의 감각이 감지해 내는 아주 얄팍한 정서다.
산 자들의 감각은 하나님의 부재와 관계된다.
인간은 살아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 관계된 교감신경과 부교감 신경을 새로이 부여 받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기를 선물받아 살아나게 된 성도의 삶에 왜 통점을 자극하는 처절한 고통이 감지가 되는가?
때로는 그 아픔이 너무 커서 기함케될만큼 고통을 느끼지 않는가...
 
하나님은 창세전에 완성해 놓은 창조의 나라를 자랑하시는 분이다.
왜 하나님 나라, 즉 성도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만 완성되어야 하는지를 교훈하시는 강의실이 역사다.
 
그래서 그 나라 백성들은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구축하는 '자아'라는 나라의 허망함과 부질없음을 반드시
통점으로 겪어내야 한다.
왜 피조물은 없음일 수밖에 없는지, 그 없음에서 생산되는 것이라고는 처절한 고통과 실패 밖에 없음을 반드시
살아내야 한다.
기형도의 시 중에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가 있다.
 
입안에 들어있는 잎사귀 같은 혀.
내 기억에 기형도는 할말이 참 많았던 선배였던 것같다. 그런데 세상이 알아듣지 못한다 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자기의 성 정체성이 일반적이지 못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다.
그걸 설명하려는데 세상이 들어주질 않았다. 그들의 눈에 그는 이미 죄인이었으므로...
그래서 그의 혀는 검게 박제가 되어 버렸다.
 
그는 하나님의 십자가가 아닌 세상의 도덕과 윤리, 보편적 정서의 눈으로 유죄 판정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파고다 극장이라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픔이다.
 
설날 특집으로 이장희 씨의 콘서트를 해 주더라. 그의 노래 중에 쇼킹한 노래가 있었다.
하나님, 도대체 난 누구입니까? 를 묻는 노래였다.
왜 철없는 인생들에게, 갈 곳 모르는 철없는 인생들에게 이 세상을 주어 놓고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느냐는
부르짖음... 그가 하나님을 만났으면 좋겠다.
왜 그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는지...
아마도 그의 부르짖음이 그의 마음 속에서 터져 나온 진솔한 것이어서 그랬던 것이리라.
동병상련.
 
사람들은 목사인 나에게 묻는다. 산 자들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현상과 증거를...
그들은 질문과 함께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 성숙, 착함, 인내, 사랑, 등등
이미 답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난 대답한다.
공식화된 증거는 없다고...
그냥 살아있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고...
적어도 본인은 안다고...
 
뇌파 치료를 받으며 호흡이라는 것을 배웠다.
늘하는 숨이거늘, 그것도 배워야 하는 인간들의 무지함이여...
숨을 들이마시고 내 쉬는 것도 이토록 소중한 것인데, 우린 참 우리에 대해 너무 모르는게 아닌가 싶다.
 
숨을 들이마시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 쉬는 하나님의 숨..
그래, 그게 생기다.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콧김, 내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아닌가?
 
숨을 내 쉬며 생각했다.
내 스스로 구축하려 했던 이 육적 자아의 숨, 호흡, 그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빼앗겨야 하는 거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쉬는데 그 안에 십자가가 있다.
 
내가 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던가?
내 안의 육적 자아의 호흡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아니였던가?
그런데 그 호흡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빼앗겼다.
난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인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날 숨'을 지켜내려 이토록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던가?
 
그 쯤되니 숨을 쉬고 싶어졌다.
진짜 숨을 쉬고 싶어졌다.
한껏 숨을 들이마신다.
하나님이 내게 들어오신다.
하나님의 숨이 내게 들어온다.
마치 현실처럼... 그리고 난 '나'를 날숨으로 내어 놓았다.
평안하다.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숨을 내 안에 간직하고 그 것을 지켜내려 스스로 고통스러워 하는 인간 보편의 실상을
그 속에서 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매순간 나의 날숨을 빼앗아 가시는거구나...
 
그건 오히려 축복이다.
그런데 왜 우린 그것을 고통으로 감지하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행복해졌다.
맞다.
성도는 고통만 감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쉬는 들숨의 행복도 분명 감지할 수 있는 존재다.
그동안 그걸 너무 잊고 살았다. 한쪽을 강조하다보니 한쪽을 잃게 된 것이다.
행복해야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행복하고,  일상으로 행복하련다.
좌뇌와 우뇌의 역할이 생각하고 감각하는 것이라 들었다. 
그런데 생각만하고 감각을 죽인 삶을 오래도록 살았던 것같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는데  우리 큰 녀석이 기뻐서 뛰어온다. 
캘리포니아 주립 씨선 대학에 합격했다고... 행복하다... 
이런 일상의 행복을 내 천국 가족들이 서서히 찾아가길 바란다. 
그동안 우린 참 많이 아파했으므로...
 
건강하게 다시 만날 때까지 행복하세요.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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