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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책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 본 설교는 2004년도 개척 첫해에 기초교리 공부 내용입니다
 
작성일 : 13-04-16 08:59
   43. 교회(11) - 온전함을 향하여 온전케 되어지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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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njsmyrna
    조회 : 4,655  


(요17:20-23)
20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22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 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릅니다.
그 기도는 전부 예수님의 제자들과 또 그 제자들의 말을 듣고 앞으로 예수를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 교회를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시키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부탁을 드리고 가신 내용이 전부 그 기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일부러 그 기도를 큰 소리로 제자들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기도를 글로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 기도를 기록으로 남겨서 앞으로 오게 될 교회들에게 꼭 전하고 싶으신 메시지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결국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함께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결론으로 모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 사역으로 완전하게 건져냈으니까 “이제 그들을 이 땅에서 지키고 보호하셔서 그들이 이 시간 속에서 자기들의 신분에 맞는 사람으로 변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는 것이 이 위대한 기도의 내용인 것입니다.
 
23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교회가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거기서 쓰인 “온전함“이라는 단어는 ”텔레이오“”perfect"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perfect"로 향해 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부르시고 자녀를 삼으시고서도 바로 천국에 넣지 않으시고 이렇게 역사를 운행하시며 우리에게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내내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become what you are!) 그 말이 무슨 말인가?
 
(고전5:7)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될 수 있도록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여러분은 누룩을 넣지 않은 반죽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
 
 
이상한 말이지요? “너희는 이미 누룩 없는 자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누룩 없는 자가 되어라 “as you really are “진짜 너“”지금 그렇게 맥없이 죄에 무너지는 그런 옛 습관에 젖어있는 너 말고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바꾸어 놓으신 진짜 너“가 되기 위해 누룩을 없애라.
노력해라. become what you are! 역시 already , not yet의 원리입니다.
누룩은 죄이지요? 그 ”진짜 나“를 향해 가면서 이 땅에서 우리가 젖어있던 그 죄의 찌꺼기들을 하나하나 버려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렇게 온전하게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상황과 여건들을 허락하시면서 열심히 끌고 가십니다.
 
(엡4:7-13) 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 은혜를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그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셔서, 포로를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합니다.
9    (그런데 '그가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이 땅의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었다는 것이(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먼저 내려오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0    내려오셨던 그분이,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하늘의 가장 높은 데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11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12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온전함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기 위해서 온전하게 되어가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나오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에서의 ‘온전케 하다‘는 카타르티스모스’ equip이라는 뜻입니다. 운동선수들을 선수답게 만들기 위해 훈련시키고 무장시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오합지졸들을 훌륭한 프로 선수로 키워 내는 과정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서 쓰인 범죄 한 자들을 “바로잡고“가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러나 13절에 쓰인 온전함이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13절에 쓰인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에서의 ‘온전함‘은 ”perfect"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오늘 본문인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나오는 온전함 ”텔레이오스“”perfect"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perfect" ”텔레이오스“ 그 온전함을 향해서 온전케 되어지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 거룩을 향해 가는 길에 허락되어진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직분들을 죽 나열해 놓고 “그것이 다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도 알곡들끼리 모여서 지상의 천국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삐치고 싸우고 다투고 끌어안고 끌어안는 듯이 하다가 내 동댕이치고 하면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런 것들을 통하여 온전하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훈련소 같은 곳입니다.
제가 논산 훈련소에 있을 때 훈련소 동기들 중에 정말 이기적인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보통 훈련소에서는 서로 고생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나누고 함께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혼자 PX에 가서 초코파이, 사이다, 우유 이런 것 사 가지고 관물 대에다 숨겨 놓고 밤마다 혼자만 먹는 애들이 있습니다. 정말 밥맛입니다. 그래서 그런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축구를 한다거나 함께 모여서 간식을 먹는다거나 할 때 절대 끼워주지 않습니다. 늘 외톨박이입니다. 그렇게 일주일만 가면 그런 아이들이 관물 대에다 숨겨 놓은 초코파이 다 꺼내서 나누어주기 시작합니다. “나눠 먹자!” “우리 엄마가 소시지 반찬은 나만 먹으라고 그랬어, 그러니까 너는 네 김치 먹어, 나는 내 소시지 먹을 테니까, 금 넘어 오지 마” 이렇게 집에서는 절대 고쳐지지 못했던 치사한 습관이 훈련소라는 공동체 안에서 일 주일 만에 고쳐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여러 종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숙한 사람, 성숙하지 못한 사람, 알곡, 가라지 들이 모여서 버려야 할 것 버리고 익혀야 할 것 익히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온전함을 향해 지어져 가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become what you are)
 
그러니까 신자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 모든 상황들, 모든 여건들은 신자가 온전하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신자의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교회의 존재 목적을 잘 못 이해하고 있고, 목표지점을 잘못 잡게 되면 교회는 교회 본연의 임무를 잃어버리고 엉뚱한 일만 하다가 망해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신자들은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통해서 ,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환경과 여건들을 통해서 온전함을 향해 한발 한발 가게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되는 가정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그 온전함을 훈련하고 연습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작고 그렇지만 효과적인 공동체가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도 역시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부부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온전함을 잘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 없이 완전할 수 없고 여자는 남자 없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상호 보완적으로 지어졌습니다. 각자가 홀로 존재할 때는 절대 온전하지 못하게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는 서로 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동경하고 그리워하고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간에 서로 끌리는 것은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남자만 모이는 교회, 혹은 여자만 모이는 교회, 그런 교회가 있다면 사람들이 모일까요? 남자가 있는 곳에 여자가 모이고 여자가 있는 곳에 남자가 모이는 것입니다. 그게 절대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서로에게 끌리도록. 남자와 여자는 우열의관계도 아니고 상하의 관계도 아니고 주종의 관계도 아닙니다.
남자는 여자가 갖지 못한 것을 보완해 주고 여자는 남자가 갖지 못한 것을 보완 해 주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동등하게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창1:27-28)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누구에게?)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서로 다른 것으로 하나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배우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과 단절이 되었고 그들은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힘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힘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외형 적으로 볼 때 힘이 없고 연약한 여자들을 약자로 취급했고 힘이 강한 남자들을 그 위에 군림하는 강자의 위치에 올려놓았습니다. 그게 다 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유사 이래로 늘 남자들은 여자들 위에 군림해 왔습니다. 오죽하면 유대인 남자들은 매일 기도할 때마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과 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것과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밥상에서 함께 식사를 하지 못했었습니다. 한 술 더 떠서 며느리는 거의 부뚜막에서 식사를 해결하곤 했습니다.
게다가 성경에 있는 “남자는 여자의 머리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 같은 구절들이 마치 남녀 차별을 조장하는 듯한 뜻으로 곡해가 되어지면서 교회 안에서도 남녀의 차별이 있어왔습니다. 지금도 어떤 교회에서는 밥도 남자가 다 먹고 나서 여자들이 먹는다고 합니다.
고린도서에 나오는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말의 그 머리라는 단어는 boss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기서 쓰인 “켑할레”라는 헬라어는 source라는 뜻입니다. source of life(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로 지어진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남자의 머리이고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뜻은 창조의 실행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남자가 창조되었고 그 남자의 뼈로 여자를 지으셨다는 질서의 측면을 강조하시는 구절인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 14장에 나오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는 구절은 당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여인들의 행태에 대한 다분히 지역적인 예를 가지고 교회의 질서를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당시 남자들에게 억압받고 핍박받고 언제든지 남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는 남편이 여자를 사사로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구실을 들어 이혼을 할 수 있었던 그런 시대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여자들이 기고만장해 졌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여자들이 마땅히 여자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않고 목소리가 커지고 하면서 예배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1장에 보면 여자들이 교회에서 숄을 쓰고 기도를 해야 했는데 여자들이 그 자유를 지나치게 남용해서 머리를 산발을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고관들의 정부들이나,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일하는 창녀들이나 노예들을 제외한 모든 여자들이 평소에도 숄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하러 온 여자들이 창녀들처럼 머리를 산발하고 그대로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14장에 나오는 대로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지나치게 말이 많고 오히려 교만해져서 예배에 방해가 되었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35절에 쓰인 “너희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다”는 말은 여자들은 예배 시간에 입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은 여자들이 예배 시간에 재잘 재잘 떠드는 것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거기서 “말하다”라고 쓰인 헬라어 단어“랄레오”는 “재잘 재잘 떠들다“라는 말입니다. ”떠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 많은 여자들이 마치 자기들만 복음을 아는 것처럼 교만하게 목소리를 높여서 떠들어대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36절에서
 
(고전14:36)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나왔습니까? 또는 여러분에게만 내렸습니까?
 
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만 임한 것처럼 그렇게 까부느냐?” “너희는 질서와 예의도 없느냐?”에 대한 경고이지 무조건 모든 여자는 남자의 아래에서 침묵하고 교회에서도 아무 소리하지 말아야 하고 밥도 남자가 다 먹고 난 다음에 먹어야 하고  그런 뜻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남녀 차별의 의도로 그런 말을 했다면 이런 구절은 뭡니까?
 
(갈3:28)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1:11-12) 11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여자의 몸에서 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무슨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있느냐?(male nor female)
성경에 나오는 그런 구절들은 단지 “여자들이 지나친 방종으로 절제를 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교만해 져서 교회의 예배에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되고 있으니 좀 calm down 하고 자중해라“라는 의도에서 충고하는 말들인 것입니다. 절대 남녀 차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찌 되었든 여자들은 그러저러한 이유로 남자들과 그렇게 차별을 받아 오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0세기가 지나면서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면서 차츰차츰 여권 신장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산업이 발달하고 고용이 증대되면서 여자들이 직장을 가지기 시작했고 경제력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까지는 남자가 벌어다 주는 것에만 의존하던 여자들이 이제 스스로 경제력을 갖게 됨으로 해서 남자에 대한 의존 의식이 점차 없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 혼자 하기에는 벅찼던 가정일 들도 세탁기나 전기밥솥, 청소기, 좋은 세제 같은 유용한 ‘문명의 이기‘들이 등장하면서 여자들이 시간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페미니즘”이라든가“여권신장” 같은 구호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게 도를 넘어서 “매 맞는 남편들”이 등장하고 직장 상사인 여자들이 남자 부하 직원을 성추행을 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점점 남녀의 구별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unisex mode라고 해서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인권 해방인양 유행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최근에 한국 기독교 여성 신학자 협회에서는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어머니”로 바꾸자고 공식적으로 신학계에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여자들이 얼마나 남자들에게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했으면 그럴까 하는 측은한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런 시도들은 성경이 말하는 남녀의 동등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남자와 여자가 이 땅에 구별되어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은 서로 다른 자들이 각자의 장점을 가지고 상대방의 부족한 것들을 채워 줌으로써 둘이 하나가 되어 온전함을 이루도록 그렇게 구별되어 지어진 것입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내가 가진 최고의 것들을 이용해서 내가 죽고 상대방이 온전해 지게 되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를 훈련하고 연습하게 하시기 위해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것이 다양한 군상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통일되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는 그 다름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하나가 되는지를 훌륭하게 연습할 수 있는 차이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달팽이처럼 인간도 암 수를 한 몸에 붙여 놓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이 뭡니까? 인간의 구원은 단순히 죄에서 해방된 것을 구원이라 하지 않습니다.
죄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이 되는 것까지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남자와 여자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남자의 남자다움과 여자의 여자다움이 회복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여자 가 남자 옷을 입고 여자가 남자를 부리는 위치에 서고 남자에게 명령하고 하는 것이 바람직한 남녀평등이 아니라 남자는 더욱 남자다워지고 여자는 더욱 여자다워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다워지고 여자가 여자다워지는 것을 “남자는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안에서 열심히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의 역할 분담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문화적인 차이 속에서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남자가 밥을 하고 남자가 반찬을 합니다. 미국에서도 여자만 음식을 하고 여자만 설거지를 하지 않습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음식을 더 잘하면 남자가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더 깔끔하게 청소를 잘하면 남자가 청소를 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찌개를 끓였는데 자기 입으로 그게 된장찌개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게 된장찌개인 줄 모르는 그런 요리 실력인데 반면에 남자는 요리를 잘한다면 남자가 요리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정의 내려놓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정의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다워지고 여자가 여자다워 진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 함으로 타락을 하고 아주 이기적인 존재로 변해 버렸지요? 그 이기심을 이타심(나를 죽여 남을 먼저 생각하는)으로 바꾸는 연습을 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남자다워지고 여자가 여자다워진다는 것은 남자는 남자의 장점인 힘과 너그러움과 포용력과 인자함으로 여자를 잘 섬겨서 그 여자가 더욱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하게 지어져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남자다워지는 것입니다. 근육이나 키우고 무력이나 쓰고 하는 것이 남자다움이 아닙니다. 남자의 남자다움은 그가 얼마나 너그러우며 그가 얼마나 인자하며 그가 얼마나 포용력이 있느냐로 가늠이 되는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여자다워지는 것은 성형 수술해서 예뻐지고 좋은 옷 사 입고, 좋은 화장품 쓰고 명품 백 들고 다니는 것이 여자다운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진짜 여자다워지는 것은 여자가 가진 장점인 아름다움과 따뜻함과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최대한 발휘해서 상대방을 섬겨서 그 상대방이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 지어져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을 “여자다운 여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힘입니다.
여자가 남자 옷 입고 다니고 “남자도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데 여자라고 왜 못하냐?“는 식의 오기로 그런 것이나 하고 하는 것이 여자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자기를 남자와 평등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신22:5)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지 말고, 남자는 여자의 옷을 입지 말아라. 주 너희의 하나님은 이렇게 하는 사람을 싫어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의복에 관한 규례가 아닙니다.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서로에게 맡겨진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으로 자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근본주의 교회에서는 여자들이 바지를 못 입습니다. ‘여자는 계속 여자답고 남자는 계속 남자 답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여자가 남자 흉내 내려고 하지 마시고 남자가 여자 흉내 내려고 하지 마세요.
남자들이 왜 귀걸이를 하고 다닙니까? 여자들이 왜 군복을 입고 다녀요?
그렇게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증명해서 “난 남자보다 강한 여자야“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싶으세요? 이 땅에 태어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 역할이 달라요. 그러나 그 역할은 모두 연출가이신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입니다. 그 역할을 충실히 해 낼 때 드라마는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부 그 역할에 충실하기로 결단하고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엑스트라이지만 예수를 믿고 어떻게 해서든지 엑스트라에서 주인공으로 캐스팅되고 말리라“ 그것을 우리가 health and wealth gospel"번영의 신학”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주받을 신학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남자와 여자의 역할의 구분도 못 하면서 다른 역할들을 해 내신다는 것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는 특히 부부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서로의 장점으로 상대방을 섬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목적으로 구별되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왜 구별되어 존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성을 만나면 생각하는 게 뭐겠습니까? sex밖에 없습니다.
이성인 상대방이 왜 나와 구별되어 존재하는지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이성의 사람을 만나게 되면 생각나는 게 sex밖에 없는 겁니다. 죄인들의 욕심은 그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다른 것으로 자기의 쾌락의 도구로 쓰고 싶은 것밖에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죄인들은 아담 이래로 모두 간음이라는 죄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 이래로 이 땅에 존재한 모든 무리의 사회법에 “간음”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아십니까? 간음은 인류 공통의 관심사이며 인류의 보편적인 죄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사춘기가 되면 성호르몬이라는 것이 분비되면서 성욕이라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 성호르몬 분비가 채 일어나지도 않은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아이들이 포르노에 중독이 되는 것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성적인 범죄나 성도착“은 단순히
성욕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8살짜리 아이가 인터넷 포르노에 중독이 되어서 엄마가 혼을 냈더니 아이가 울면서 그러더랍니다. “엄마, 참 이상해 안 보려고 하는데 컴퓨터만 켜면 자꾸만 보고 싶어” 이러한 성적인 범죄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기적이며 자기의 힘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죄인들의 대표적인 성향인 것입니다. 상대방을 이용해서 나의 만족을 채우고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그래서 성경에서도 돌로 쳐서 죽일 수 있는 범죄에다가 간음을 넣어 놓은 것입니다.
 
 
남녀 간의 성적인 결합은 하나님께서 부부에게만 허락하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자기가 가진 다른 것으로 상대방을 섬기며 둘이 하나가 되어 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육체적인 결합은 부부 사이의 친밀감을 더해 주고 깊은 하나 됨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그러한 육체적 간음을 하는 자들은 아직도 인간 존재의 의미, 남녀가 구별되어 존재하는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자들인 것입니다.
성 관계는 성경에서도 명시하듯이 사회 법 상으로 공인된 부부간에서만 용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 달에 약혼할 사이라 할지라도 절대 용납되지 않는 것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타락한 남자들이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섹스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십니까? 죄인들이 궁극적으로 많은 섹스를 갖기 위해 힘을 , 돈을, 명예를 추구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타락한 여자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서 남자가 가진 힘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게 모두 이기적이며 교만한 죄의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들은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한 자들입니다. 왜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는지 왜 교회가 존재하는지 왜 나에게 이해 못할 상황들이 일어나는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거룩과 온전함을 위해 선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남녀가 만나 연인이 되고 연애를 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섬기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수준으로 자라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만나기만 하면 그저 성적인, 육체적인 것만을 탐닉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안 해줬다고 늘 다투고 삐치고 헤어지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 선물을 준 사랑하는 사람을 최대한으로 모욕하는 방법이 뭡니까? 그 선물을 발기발기 찢어 버리는 것입니다. 땅에 내 던지고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부에게만 주신 귀한 선물을 엉뚱하게 오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주 효과적으로 모욕하는 것입니다. 살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죽임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면 간음은 하나님의 선물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죄는 돌로 쳐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혼인 외의 성 관계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가혹한 폭력이기도 합니다. 그 상대방을 이용해서 나의 쾌락을 구하는 이기심의 발로입니다. 상대방이 나중에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는 아무 상관없이 지금 나의 욕구만 채우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 상대방이 나중에 혼인을 한 후에 남편으로 아내로 순결하고 성실하게 쌓아가야 할 온전함의 길에 지뢰를 설치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절대 혼인 외의 성 관계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곳에 많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연인 사이인 친구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여러분이 상대방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고 무엇을 요구하고 있으며 어떻게 함께 온전함을 향해 가고 있는지 고민해 보십시오. 그저 만나면 상대방을 이용해서 내가 어떻게 편해질까?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이용해서 내가 기뻐질까? 만을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시 상대방이 나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도 나는 절대 잊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이기적인 생각에 상대방에게 자기를 깊이 심어 놓으려는 그런 노력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건 폭력입니다. 모욕입니다. 이제 멈추십시오.
그리고 자꾸 하나님을 알아 가십시오. 그 욕정의 여인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나자 그 녀에게 참 만족이 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예수가 없는 자들이 만나기만 하면 생각하는 게 추잡한 짓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고 신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통해 나의 만족을 채우려는 시도는 혹 여러분이 결혼을 한다고 해도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큰 적이 될 것입니다.
 
(고전5:1-8) 1    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일까지도 있다고 하니, 그러한 음행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런데도 여러분은 자만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여러분은 그런 음행을 통탄하고,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서 제거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3    나로 말하면, 비록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이, ( 또는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벌써 심판하였습니다. 4.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에……')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이미 심판하였습니다.
4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에,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의 권능과 더불어 여러분과 한자리에 있으니,
5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주어서, 그 육체는 멸망을 당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해야 할 것입니다.
6    여러분이 자랑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7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될 수 있도록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여러분은 누룩을 넣지 않은 반죽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  8    그러므로 우리는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을 넣은 빵으로 절기를 지키지 말고, 성실과 진실을 넣어서 만든, 누룩 없이 된 빵으로 지킵시다.
 
음행을 하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바울이 엄히 경고하는 대목입니다. “나는 음행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 그러니 회개하고 구원 받아라“ ”누룩을 버려라“ 누룩은 죄입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킬 때 집안에 누룩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집을 멸해 버리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은 그 죄의 습관, 경향, 누룩을 자꾸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월절은 언제입니까? 매일 매일이 우리 교회의 유월절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교회는 매일 매일을 그 구원의 감격으로 살아가야 하는, 매일 매일을 유월절로 지켜야 하는 자들입니다. 누룩을 버리십시오. 우리는 본능적으로 더러운 것들을 우리 몸 밖으로 버리는 행위를 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화장실을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들은 본능적으로 더러운 것들을 피하고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그냥 더러운 세상 원리에 젖어 있다가 사망으로 가게 되지만 살아있는 자들은 더러운 것들이 오면 피합니다. 살아있는 돼지는 먹을 것을 주면 열심히 먹습니다. 파리가 붙으면 열심히 쳐내면서 먹을 것을 먹습니다. 죽은 돼지는 먹을 것에는 반응하지 못합니다. 그 죽은 돼지에는 파리가 붙어서 알을 낳고 구더기가 되어서 순 식간에 뼈만 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쳐내는 피나는 노력을 하실 것입니다.
 자꾸 자꾸 여러분의 속을 하나님으로 채우세요. 피 눈물 나는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공허하게 비워두지 마세요. 공허한 마음은 늘 무언가를 채우려 시도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채우셔야 합니다.
 
(잠4:23)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마음은 생각과 행위의 컨트롤 타워입니다. 온통 불륜 이야기 투성이인 비디오, TV 같은 것 너무 많이 보지 마세요.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십시오. 우리 안에 채워 넣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 그래서 요즘 인터넷에도 잘 안 들어갑니다. 맨 보이는 게 더러운 범죄들뿐이라 아예 보지 않습니다. 더러운 것들은 피하세요.
 
죄는 계속해서 죄를 낳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으면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한번 두 번 숨게 되면 계속해서 어두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그러한 죄를 발견하게 되면 교회 앞에 드러내 놓고 회개하게 하고 고치게 하고 바로잡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치리입니다.
만일에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누룩들이 발견이 될 때는 반드시 교회에서 치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올바른 교회의 표지3가지가 무엇입니까?
올바른 말씀 선포, 올바른 성례, 올바른 권징입니다.
요즈음은 개나 소나 전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니까 그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혹시 손님 떨어져 나갈까봐 절대 교인들에게 싫은 소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교회는 성도가 잘못했을 때 반드시 징계를 해야 합니다.
 
바울이 음행을 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그들을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잠시 내 쫓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라면 그 무리에서 쫓겨난 자들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교회 밖의 세상은 사단의 통치가 있는 곳입니다. 그것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 교회가 맞다 면 그 사람은 절대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한 달간 교회 출석을 하지 마세요.” 내지는 “두 달간 공중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내지는 “세 달간 예배 참석을 못 합니다” 교회의 재판부가 이런 판결을 내려 버리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교회가 타락을 해버린 상태에서는 그게 무슨 큰 벌이겠는가 싶겠지만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교제 권에서 밀어내어 버리면 견디지 못합니다.
 
전쟁 중에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내리는 가장 큰 징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투가 있을 때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내무반에서 바둑이나 두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벌이냐?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pilot들에게는 그것보다 큰 벌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리에서 잠시라도 쫓아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큰 벌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함께 신앙 생활하는 교회 지체들에게 악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했을 때 여러분은 쫓겨 날 각오를 하십시오. 공공연하게 술을 마신다던지, 도박을 한다던지, 교회의 멤버들 끼리 서로 다퉈서 그 다툼의 여파가 교회의 하나 됨을 방해한다든지 해서 아직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의 신앙에 해가 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직분 자는 영원히 직분에서 탈락시켜 버릴 것이고 공개적으로 교회 앞에서 자기 죄를 시인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다 교인들 다 나가면 어떡합니까?’하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 텐데 괜찮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그렇게 망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앞으로 더욱 더 힘써 여러분의 삶에 남아 있는 누룩을 쳐서 없애십시오. 이제 말뿐인 그런 어린 유아기 적 신앙에서 좀 벗어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perfect" 한 곳으로”온전한 곳으로“ 열심히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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